OMF와 성서유니온의 관계는 특별합니다. 1972년 한국성서유니온이 영국 OMF 선교사들을 통해 설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양적 성장에 비해 영적 깊이는 부족했던 1970년대 한국 교회에 성경읽기 운동의 씨앗이 뿌려지고 열매가 맺히기까지는 수많은 선교사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1974년 OMF 파송으로 한국에 와 25년을 사역하다, 갑작스런 발병 때문에 호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세실리 모어(Cecily Moar, 모신희) 선교사님의 귀한 헌신도 잊을 수 없습니다. 지난 10월, ‘선교의 좋은 롤모델이자 부산 지역에 영적 알곡이 가득 차도록 도운 분’(『한국을 사랑한 선교사들』, 로뎀북스)으로 회고되는 모어 선교사님의 한국 방문을 기념하는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인터뷰 진행에는 OMF와 성서유니온을 통해 모어 선교사님과 깊은 인연을 맺어 오신 성서유니온 전 대표 도문갑 목사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유창한 한국말로 내내 진솔하고 유쾌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신 모어 선교사님께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도문갑 목사님(이하 도문갑): 선교사님, 반갑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모어 선교사님(이하 모어): 안녕하세요. 십여 년 만에 한국을 찾았습니다.
도문갑: 먼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모어: 제가 10살 때의 일입니다. 호주의 의료인들이 한국전쟁이 발발한 한국 부산에 병원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주일학교에서 들었어요. 그때 처음 한국에 간호선교사로 가겠다고 마음먹었죠.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 수련회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이전까지는 예수님에 대해 “알았을” 뿐이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었어요.) 묵상하는 법을 배웠어요. 이후로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더 확고하게 결심할 수 있었지요.
도문갑: 독신으로 이 먼 나라에 선교하러 오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셨나요?
모어: 사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었습니다. 간호학교 2학년 때, 독신인 여 선교사님들을 많이 만났거든요. 저도 선교하러 가면 결혼을 못 할 것 같아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바꾸려던 차에 하나님께서 묵상하는 가운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이후 뉴질랜드 바이블컬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파송 받을 때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붙잡고, 결혼을 못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괜찮다는 마음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신 말씀은 이 말씀이었어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도문갑: 매일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신 것이 참 감명 깊습니다.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떠했는지요?
모어: 당시 OMF는 한국 교회에 대해 ‘어린이 교육, 학교 교육, 젊은이 사역, 개인 성경공부가 비교적 약하다’고 진단했고, 성서유니온의 성경읽기와 묵상 운동으로 한국 교회를 돕고자 했습니다. 저도 「매일성경」을 보급하고 묵상을 가르치며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소그룹 성경공부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때의 성경공부는, 목사님이 앞에서 가르치고 50여 명의 성도가 뒤에 앉아 듣기만 하는 식이었지요. 나눔도 없었습니다.
도문갑: 오랫동안 부산에서 소그룹 사역을 위해 애쓰셨는데, 그 외에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역이 있으신지요?
모어: 1975년 마산 중고등학생을 위해 열었던 제1회 비치 캠프가 생각이 나네요. 다양한 호주 성서유니온의 사역 중에서도 저는 특히 해변 전도와 캠프를 한국에서도 펼치고 싶었습니다. 호주의 경우 복음주의 교회들이 연합해서, 캠프에 일가견이 있는 성서유니온에 캠프를 위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문갑: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역이었겠네요. 어린이 사역에도 관심이 많으셨지요?
모어: 네. 제가 처음 부산에 내려왔을 때는 재밌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에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어린이 예배가 어른 예배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던 거죠. 이대로 가다가는 나중에 아이들이 교회에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신 교육위원회와 함께 어린이들을 위한 시청각 교재를 많이 개발했습니다.
(사진설명: 교재 편찬 작업 중인 모어 선교사,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들』, 로뎀북스)
도문갑: 다양한 단체와 다양한 사역을 함께 하셨군요. 그런 사역들이 마냥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모어: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은 한국어였어요. 못 배우겠다며 운적도 있답니다.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당시 성서유니온 부산지부 간사였던 권춘자 선생님과 함께 살며 한국말을 잘 익힐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한국의 사고방식도 배워, 이후의 사역을 위한 기초를 든든히 세울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때는 한국에 여자 사역자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는 것도 조금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도문갑: 선교사님이 고신 교단과 여러 사역을 함께하시며 고신 목사님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주신 덕분에 고신 교단이 좋은 영향을 받은 것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건강상의 어려움도 있으셨지요?
모어: 1996년, 골수종 진단을 받았는데 외국인 의료보험이 없어 치료를 위해 호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치료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사역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섭섭하지는 않았죠. 그런데 이후 한국에 다시 왔다가도 보험 문제로 또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은퇴할 때까지 한국에서 사역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서 아쉬웠지요. 그렇지만 이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한국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참 서운했어요. 한국 친구들에게 받은 사랑이 많았거든요.
도문갑: 지금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모어: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직 약을 먹어야하지만, 이제는 ‘건강한 암 환자’랍니다. (웃음)
도문갑: 건강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선교사님의 건강을 위해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호주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모어: 호주에서도 한국인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한국인들과 성경공부 모임을 합니다. 한국에 와 옛 친구들을 오랜만에 보고 나니, 호주로 돌아가면 그들 한 명 한 명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카오톡으로 자주 기도제목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웃음)
(사진설명: 10월 26일, SU 본부 채플에서 본부 간사들과 함께)
(사진설명: 10월 26일, SU 현 리더십, 전 리더십과 함께)
도문갑: 말씀의 인도를 받는 삶의 본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매일성경」 독자들과 성서유니온 동역자들을 위해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모어: 제가 겪은 가장 행복한 경험은 「매일성경」으로 묵상하며 예수님을 몇 번이고 만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Instruction Book’을 깊이 공부하고 묵상함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