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일곱 화를 선언하십니다. 위선적인 신앙에 대한 심판의 경고는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인 종말에 관한 긴 가르침(24-25장)의 서론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전체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의 복’(5장)을 약속하지만 위선자에게는 심판의 화를 경고합니다. 주님은 탐욕만큼이나 위선을 싫어하십니다. 지도자의 위선이라면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할 것입니다. 남다른 지위에 경건의 모양까지 갖추었으니 가려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가장된 신앙은 불신앙보다 위험합니다.
13-15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릇된 가르침과 위선적인 생활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개종자를 얻는 데는 열심이지만 그들을 천국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눈먼 인도자의 열정은 자신도, 개종자도 실족하게 합니다. 교인 하나를 더 얻으려는 전도의 열정도 아름답지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16-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 편의대로 지켜야 하는 맹세와 안 지켜도 되는 맹세를 구분했습니다. 사소한 맹세들로 중대한 맹세들을 대체했고, 맹세를 지키지 않는 자신들을 합리화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도 모르고, 편의적으로 무시해버린 맹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도 알지 못하는 ‘눈먼’ 자들입니다. 신의도, 경외도 다 잃고 잇속만 챙기는 서늘한 종교인들입니다.
23,24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버리고 형식만 붙잡았고, 외적인 것에 집착하느라 내적인 것을 외면했습니다.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철저함 배후에는 낙타를 그냥 삼키는 터무니없는 이율배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본질을 떠날 때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수많은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순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25-28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은 화려하게 꾸며진 무덤과 같습니다. 마음에 탐욕이 가득해도 얼마든지 겉은 깨끗해 보일 수 있습니다.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 가장 위선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섬뜩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능한 현실이고 내가 그리될 수 있습니다.
기도
공동체-앎과 삶, 겉과 속, 처음과 끝이 한곁같은 사람(교회)이 되게 하소서.
열방-생계와 안전을 위해 고향이나 고국을 떠난 난민들을 전 세계가 한마음으로 품고 나라마다 적절한 난민 정책을 세워 이들을 지원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