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와 함께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하신 예수님은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시고 죽음을 향해 분노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28-30절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애곡하는 무리가 있는 곳에서 마리아를 불러내십니다.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신 것은 죽음을 끝낼 존재로서 죽음의 지배를 받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고, 마리아를 불러내신 것은 그 세계에서 나와 생명의 주께로 오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생명과 사랑의 나라로 부르시는데 아직 죄와 죽음이 왕 노릇 하는 세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마리아처럼 ‘급히 일어나’ 예수께로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31-35절 마리아도, 그를 위로하러 온 유대인들도 모두 울고 있을 때, “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하시며 무덤을 찾으십니다. 모두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서 “와서 보옵소서” 하는 체념의 초대를 받아 무덤으로 나아가십니다. 생명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억류하고 있는 사망의 진지로 돌격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관망하지 않으십니다. 썩어 냄새나는 절망의 현장, 가장 비참한 죽음의 자리까지 찾아오십니다. 주님이 내 아픔에 당도하시는 순간, 그곳은 무덤이 아니라 생명의 산실이 됩니다.
33,35절 마리아와 조문객들이 우는 것을 보시더니 “비통히 여기시고”(격분하시고) 끝내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하는 이의 아픔에 대한 완전한 공감이자, 인간을 짓누르는 죄와 죽음에 대한 거룩한 분노이며, 죽음의 세력을 멸하려는 각오입니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이토록 격한 감정을 느끼신 까닭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겪는 절망에 함께 슬퍼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 절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행동하십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6-37절 예수님의 행보를 보며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립니다. 예수님의 눈물에서 사랑을 읽어 내고 예수님의 마음에 공감한 사람과 ‘눈먼 사람도 고쳤다면서, 자기 친구는 왜 죽게 뒀느냐?’ 하며 비난하고 의심하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같은 경험을 하고도 전혀 다른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보는 우리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
공동체-슬픔 속에서도 주님의 눈물에 담긴 사랑과 능력을 믿고 주께로 나아가게 하소서.
열방-콜롬비아의 카타툼보 지역에서 무장단체 간 분쟁으로 여성 대상 폭력이 증가하고, 지난해에만 6만 명 이상이 강제 이주했다. 그 땅이 하루속히 평화와 안정을 되찾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