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최후 변론에 대해 친구들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자 젊은 지혜자 엘리후가 하나님의 변호자로 자처합니다(32-37장).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5절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발언을 시작합니다. 욥기는 이제껏 욥과 세 친구의 대화로 진행되었는데, 사실 엘리후라는 사람이 곁에서 침묵을 지키며 네 사람을 지켜봐왔던 것입니다. 엘리후는 고대의 예법상 연장자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지만, 세 친구들의 출신 소개(2:11)에 비해 긴 별칭을 사용하는 허세 가득한 인물로 드디어 본색을 드러냅니다. 엘리후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욥과 그런 욥의 확신을 꺾지 못하는 세 친구를 다 못마땅해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세 친구의 ‘보응 신학’만 되풀이할 것이고, 욥과 세 친구로부터 아무런 대답조차 듣지 못할 것입니다. 내 발언의 동기가 자기 과시라면, 계속 침묵하고 경청하는 게 훨씬 지혜로운 선택일 것입니다.
6-10절 엘리후는 연장자인 욥과 세 친구를 젊은 자신이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지혜가 경험에서만 비롯되는 것이라면 연장자들끼리의 대화 앞에서 계속 입을 다물어야 할 테지만,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재능이므로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자신합니다. 물론 나이와 지혜가 비례하지는 않지만, ‘전능자의 숨결’을 도구로 삼아 자신을 추켜세우고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엘리후의 모습은 경솔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11-14절 엘리후가 세 친구들보다 지혜롭다면, 욥을 어떻게든 죄인으로 만들려는 친구들의 지혜에 주목하지 않고 욥의 고통과 아픔을 헤아리고 공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친구들이 욥을 어떻게 꺾는지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결국 세 친구가 포기하고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자 자신이 욥을 꺾겠다며 나섭니다. 세 친구와는 다른, 더 지혜로운 이론으로 욥을 꺾겠다고 자만해 있습니다. 내 관심은 고난당하는 자의 회복에 있습니까, 아니면 고난의 이유를 찾아 논하는 데 있습니까?
15-22절 엘리후는 자신의 지혜로 욥의 고난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말하겠다고 하지만, 사실 말하고 싶은 걸 견딜 수 없을 뿐입니다. 대화에 참여할 때 내 말이 틀릴 수도 있음을 전제하고 말을 절제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기도
공동체-인간의 좁은 지혜로 쉽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열방-25세 미만인 세대가 60% 이상인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SAT-7과 같은 위성 방송 사역이 힘을 얻고 있다. 이 일에 협력하고 후원하는 손길이 늘어나고, 그 땅의 교회들이 부흥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