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4:15-24 내 집을 채우라
1. 잔치를 배설하시는 하나님(15-16)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도록 하여 의인들의 부활 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는 것이 복이 된다는 말씀을 들은 한 사람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는 자기는 이만큼 했으니 복을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강림하시면 제일 큰 잔치를 베푸실 것인데 이방인들이나 죄인들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고 오직 유대인들만 참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큰 잔치의 비유를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잔치로서 천국 잔치를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잔치를 베풀었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천국을 큰 잔치 혹은 혼인 잔치에 비유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큰 잔치나 혼인 잔치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참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큰 잔치의 비유는 미래의 사건으로 묘사하지만, 이는 천국의 모형으로서 이미 천국이 우리 마음에 실현이 되었기에, 이 잔치는 천국의 모형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잔치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잔치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기쁨의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잔치는 나의 기쁨이 아닙니다. 잔치를 베푸는 자의 기쁨에 내가 동참하는 것이지, 나의 기쁨이 아니기에 잔치에서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 아니라 잔치를 베푸는 자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고, 나는 내가 초청된 것에 대한 감사로서, 이 기쁨에 같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푼 잔치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져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베푼 잔치이기에,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 마음에 구원받게 해주신 은혜가 넘쳐서 잔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했기에 잔치를 배설해 준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이 넘치는 예배, 모든 성도가 서로 하나 됨을 인식하고, 사랑하고, 서로 돕는 자로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뻐하는 자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한 자와 같이 슬퍼하면서 형제가 연합하여 하나 되고 나누는 그래서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예배가 되도록 합시다.
2. 초청에 응하도록 합시다(17-20)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자 한 사람은 밭을 샀기에 나가 보아야 하기에 갈 수 없고, 한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기에 시험하러 가니 갈 수 없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장가들었기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풍습에서 잔치를 여는 사람은 사전에 날짜를 정한 다음 종을 보내어 참석 여부를 물은 후에 종을 재차 보내기에 당일이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모욕을 준 것이요, 두 번째 초청을 거부하는 것은 선전 포고로 간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많은 복음 전도자들을 통하여 천국 잔치의 초대장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거절하였습니다. 이들의 거절은 처음의 약속을 어긴 행위였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을 완악하게 거절하는 핑계를 끊임없이 제시해 왔습니다. 또한 이 거부는 처음 사랑을 버린 자들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초청을 거부한 자들은 이 땅에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의식주가 필요하기에 밭과 소가 필요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삶의 주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사고가 삶을 주장하기보다는 말씀이 사고를 주장해야 합니다. 곧 육체적인 조건을 이루어 가는 삶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변화된 가치관이 삶을 이끌어야 합니다.
신앙은 주인 바꾸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은 자는 세례를 통하여 내가 죽었기에 내 안에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 나를 주관하도록 나의 모든 것을 양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영에 민감해야 합니다. 주의 음성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내 신앙이 나의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신앙이 되도록 순종훈련이 계속돼야 합니다.
영에 민감하여 하나님의 초청에 즉각 응답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3. 하나님의 집을 채우도록 합시다(21-24)
큰 잔치를 배설한 후 청함을 받은 자들이 초청에 응하지 않자 진노한 집주인은 종들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합니다. 종이 순종한 후 주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라고 말하자 주인은 종에게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하면서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초청을 받았던 자들의 거부는 단순한 약속 위반이 아니라 중대한 인격 모독이었기에 주인은 굉장히 진노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라고 말함으로써 종들에게 떨어진 명령은 매우 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그들의 수효에 맞추어 음식을 장만하고 자리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그들이 마음은 변하고야 말았습니다. 이제는 잔치 시간이 임박하였고 준비한 음식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그것을 먹지 못해 버려야 할 형편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잔치는 자기 백성을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준비한 구원의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들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시각장애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계층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계층으로 변화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빈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강권하여 채우도록 합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끈질기고도 놀라운 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철저한 배타성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 각양각색의 모든 인종 등 온 인류를 구원의 잔치 자리에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강권하여 채워야 합니다. 강권은 설득이란 말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아끼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구원의 길로 가기를 강력히 설득해야 합니다. 빈부귀천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갈급한 자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채우는데 우리가 채울 것이 있고 하나님이 채울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사람으로 채워야 합니다. 사랑과 봉사로 채워야 합니다. 열심히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먼저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성령으로 채워주십니다.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채우되 흔들어 채워주십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강권하여 채움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