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5:16-32 조롱받는 왕
1. 고난을 승화시키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16-20)
군인들이 예수님을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끌고 들어가 온 군대를 모읍니다. 그리고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합니다.
브라이도리온이란 라틴어에서 온 말로 원래는 군대 진영에 있어서 장군 텐트나 본부로 사용되는 막사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로마 총독의 관저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마음껏 희롱하고자 아무에게도 방해를 받을 염려가 없는 브라이도리온으로 데려가 온갖 조롱을 다 합니다. 특히 왕 놀이를 하기 위하여 왕들이 입는 홍포, 곧 자색 옷을 입히고(마 27:28) 날카로운 가시로 만든 관을 머리에 눌러 씌움으로 고통을 느끼도록 하였습니다. 게다가 옷을 벗기고 다시 입히는 등 멸시와 조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행위가 예수님께서 진정 왕이심을 보여준 계시적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실 만왕의 왕으로 오시겠지만 이미 우리의 왕으로서 임재하신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왕으로 모시려면 죄의 문제가 해결해야 했기에 죄인들의 죄악을 당당하시기 위하여 죄인들을 대신할 제물로써 온갖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다 받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천사보다 낮아지셨습니다(빌 2:8). 이러한 낮아지심으로 우리가 높여지고 주님의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시험을 당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 모욕을 참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의 현장을 은혜와 승리, 치유와 영생의 자리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난은 없어질 금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고난의 풀무 속에서 새로운 영적 통찰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2. 대속의 십자가,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21-22)
예수님을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채찍질에 갈기갈기 찢긴 예수님의 옷을 도로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군인들이 시몬으로 하여금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게 하여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릅니다.
당시에 사형수는 68kg 정도 되는 십자가 나무를 지고 시내를 거쳐 사형장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죄인들에게 물을 주면 같은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했기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도저히 지고 갈 수 없기에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짊어지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이 후에 복을 받습니다. 그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시몬이 짊어진 십자가는 자기에게는 고통의 십자가였고 너무나 힘들고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그 자녀들에게는 엄청난 축복의 열매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시몬과 같이 내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인간 편에서 보면은 얼지로 진 십자가이지만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이를 감당했을 때 그 결과는 놀랍습니다. 이유는 자기 의지가 없는 십자가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도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중의 상당수가 주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기는 원하면서도 그분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져야 합니다. 아무도 고난이라는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행 14:22).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신 은혜 속에 평강을 주신 목적을 깨달아 주신 십자가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합시다.
3. 남을 구원키 위해 오신 예수님(23-32)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십니다.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좌우에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합니다. 그리고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키 위해서 오신 분이시지 자기를 구원키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 입니다. 그래서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거절하십니다. 옛적부터 내려온 전통에 의하면 예루살렘시에 거주하는 경건한 부녀자들이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사형수에게 마취성이 섞인 음료를 제공하였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전적으로 그대로 의식하시며 참으시려고 거절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남을 중심으로 한 삶, 남에게 사랑을 쏟아부은 삶이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 헐벗고 초라한 자, 병들고 불구 된 자, 그리고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자 등을 감싸주시고 고쳐주시고 섬기면서 33년을 분주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남보다 먼저 내 세운 일이 없으셨습니다. 한결같이 남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 이 모든 것의 결론이며 종합입니다. 십자가 없는 말씀과 기적은 무의미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예수님의 말씀도 기적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섬김도 십자가 없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물로 주신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을 통하여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요?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원하십니다(엡 3:6). 그래서 교회는 이 사명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감당해야 합니다. 복만을 구하는 기복신앙 그리고 성령의 감동함이 없이 약속의 말씀 몇 마디만을 부여안고 있는 냉랭한 신앙은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를 원하신 뜻을 발견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합시다.